미분으로 의식을 묻다, 그래드랜드가 제안한 경험의 구조
Jacobian 행렬이 현상적 경험의 구조를 규정한다는 가설을 그래드랜드라는 미분 가능한 세계를 통해 따라가며, effective rank와 cohesion이 생생함과 지속을 어떻게 설명하는지 살펴봅니다.
원문 논문 보기
오늘 다룰 논문은 arXiv에 공개된 Gradland: On Phenomenal Experience, Differentiated Across Many Dimensions (arXiv:2609.09306)입니다. 원문 링크는 제목 아래에 붙어 있습니다. 이 연구가 내세우는 주장은 한 문장으로 정리할 수 있는데, 물리적 상호작용의 1차 구조인 gradient와 Jacobian 행렬이 현상적 경험의 구조를 규정한다는 것입니다.
저는 이 논문에서 가장 흥미롭게 본 부분은 의식이라는 주제를 수학의 언어로 정면으로 붙잡으려 한다는 점이었습니다. 보통 의식 이야기가 나오면 논의는 금방 철학적인 선언이나 뇌 스캔 사진 몇 장에서 멈추곤 하죠. 그런데 여기서는 묻는 방식 자체가 다릅니다. 경험이 풍부하다는 말이 정확히 무슨 계산적 상태를 가리키는지, 그 상태를 행렬 하나로 쓸 수 있는지를 묻습니다. 그래서 읽는 내내 마음 한켠이 조금 불편하면서도 계속 다음 장을 넘기게 됐습니다.
의식을 미분으로 설명한다는 발상이 낯설었던 이유
안녕하세요, 패트릭입니다. 의식을 수식으로 설명하겠다는 시도를 들으면 많은 분들이 먼저 고개를 갸웃하실 겁니다. 저도 그랬는데요. 느낌이라는 것은 본래 수치로 잴 수 없는 영역처럼 보이기 때문입니다. 빨간색을 볼 때의 그 느낌, 아침 공기가 코끝을 스칠 때의 그 결을 행렬로 쓰겠다는 말은 언뜻 무리해 보이죠.
그런데 논문의 접근을 따라가다 보면 이 낯섦이 어디서 오는지 조금 분명해집니다. 우리가 평소에 의식을 이야기할 때는 이야기의 단위가 너무 크기 때문입니다. 자아가 있다거나, 주의가 간다거나, 기억이 떠오른다는 식의 큰 덩어리 말이죠. 반면 이 논문은 단위를 확 낮춥니다. 지금 이 순간 물리계 안에서 어떤 작은 변화가 다른 부분에 어떤 기울기로 영향을 주는지, 그 1차 근사를 보자는 것입니다. 생각해보면 사람도 비슷하게 배웁니다. 복잡한 기계가 고장 났을 때 전체를 한 번에 이해하려 하지 않고, 한 나사를 돌리면 어디가 얼마나 움직이는지부터 확인하죠.
여기서 재미있는 질문이 생깁니다. 만약 경험의 차이를 이런 기울기의 구조 차이로 쓸 수 있다면, 우리가 막연히 생생하다고 말해온 상태들도 서로 비교할 수 있지 않을까요. 저는 이 대목에서 논문이 다루는 주제의 무게보다 묻는 방식의 소박함이 더 눈에 들어왔습니다. 거창한 답을 미리 정해놓고 증거를 끼워 맞추는 대신, 잴 수 있는 구조부터 정의하고 그 위에 해석을 얹는 순서였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그래드랜드는 어떤 세계일까
논문은 논의를 위해 Gradland라는 가상의 세계를 세웁니다. 거주자는 신경망이고, 물리 법칙은 알려져 있으며, 함수는 대부분 미분 가능하다고 가정되죠. 현실의 뇌는 이렇게 깔끔하지 않습니다. 뉴런은 터지듯 발화하고, 시냅스는 잡음이 많으며, 측정 자체가 어렵습니다. 그래서 저자는 아예 현실의 지저분함을 잠시 옆으로 밀어놓고, 물리학을 전부 아는 세계에서는 의식에 대한 질문을 어디까지 밀어붙일 수 있는지 보고 싶어 합니다.
이 선택은 실험실의 깨끗한 수조 같은데요. 실제 바다에서는 파도와 해류와 바람이 한꺼번에 몰려와서 어느 힘이 무엇을 움직였는지 알기 어렵죠. 반면 수조에서는 파도 하나를 만들고 그 반응을 정확히 잴 수 있습니다. Gradland도 그런 수조입니다. 물리가 알려졌다는 말은 곧 Jacobian을 정확히 계산할 수 있다는 뜻이고, 그렇기 때문에 느낌에 대한 가설을 손으로 만질 수 있는 형태로 바꿀 수 있습니다.
문제는 그다음입니다. 이렇게 이상화된 세계에서 얻은 이야기가 우리 세계에도 해당할까요. 저는 여기서 조금 멈칫했습니다. 이상화는 언제나 양날이기 때문입니다. 한편으로는 분석을 가능하게 하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현실의 중요한 결을 잘라낼 수도 있죠. 다만 논문의 태도는 이런 걱정을 피하지 않고 오히려 전면에 둡니다. Gradland는 답을 주는 세계가 아니라 질문을 정확하게 만드는 세계라는 것입니다. 이 솔직함 덕분에 저는 이 가정을 읽을 만한 도박이라고 봅니다.
야코비안이라는 렌즈를 고른 이유는 뭘까
야코비안이라는 말을 들으면 많은 분들이 대학 시절 미적분 수업의 기억부터 떠올리실 겁니다. 여러 입력이 여러 출력에 연결될 때, 각 입력의 미세한 변화가 각 출력을 얼마나 흔드는지를 모아놓은 표라고 할 수 있죠. 논문은 이 표가 바로 현상적 경험의 구조를 비추는 렌즈가 될 수 있다고 제안합니다.
왜 하필 1차 구조일까요. 그 이유는 상호작용의 첫인상이 거기에 담기기 때문입니다. 어떤 계가 지금 이 순간 서로에게 얼마나 민감하게 연결돼 있는지는 큰 곡선을 다 그려보지 않아도 기울기만으로 읽을 수 있죠. 마치 악수를 할 때 상대의 손에 힘이 얼마나 실렸는지를 첫 접촉으로 느끼는 것과 비슷합니다. 전체 대화를 다 나눠보지 않아도 관계의 긴장도가 전해지죠.
반면 이런 선택에는 분명한 한계도 있습니다. 기울기는 어디까지나 지금 순간의 선형 근사이기 때문입니다. 먼 미래까지 이어지는 비선형적인 운명이나 갑작스러운 전환을 다 보여주지는 못하죠. 저는 이 숫자보다 그 뒤의 구조가 더 중요하다고 봅니다. 논문이 야코비안을 모든 의식의 답이라고 말하는 것이 아니라, 경험의 차이를 물을 수 있는 공통 언어로 제안한다는 점이렁죠. 언어가 생기면 그다음에는 비교가 가능해지고, 비교가 가능해지면 그다음에는 설명을 겨룰 수 있으니까요.
차원이 많다는 것은 어떤 느낌일까
논문이 내놓은 첫 번째 도구는 effective rank입니다. 일반 rank가 0이 아닌 고유값의 개수를 세는 개념이라면, effective rank는 그 중에서 실제로 살아서 움직이는 차원이 몇 개인지를 잰다고 이해할 수 있습니다. Jacobian이라는 표 안에서 입력의 서로 다른 변화 방향이 출력 쪽에도 서로 다른 변화로 살아남는지, 아니면 중간에 뭉개져서 사라지는지를 보는 것이죠.
일상적인 비유를 들어보겠습니다. 같은 반죽이라도 국수를 뽑으면 가닥이 살아 있고, 죽을 쑤면 가닥이 사라지죠. 둘 다 밀가루와 물로 시작하지만 결과물의 결이 다릅니다. effective rank가 높다는 것은 국수 쪽에 가깝습니다. 작은 차이가 작은 차이로 계속 살아남아서 경험의 결이 촘촘해진다는 뜻이죠. 반면 rank가 낮다는 것은 많은 입력 차이가 출력에서는 하나의 뭉뚱그려진 반응으로만 남는다는 뜻입니다.
그렇다면 이런 구분이 왜 경험과 연결될까요. 논문의 해석을 따라가면, 구분된 차원이 많을수록 세계의 서로 다른 가능태가 서로 다른 느낌으로 남기 때문입니다. 왼쪽이 살짝 움직인 것과 오른쪽이 살짝 움직인 것이 같은 느낌으로 뭉개지지 않고 각자 다른 흔적으로 남는 것이죠. 저는 이 대목이 논문 전체에서 가장 손에 잡히는 제안이라고 느꼈습니다. 생생하다는 막연한 말을 차원이 살아남는다는 구체적인 그림으로 바꿔주기 때문입니다.
촘촘하게 얽혔다는 것은 어떻게 잴까
두 번째 도구는 cohesion인데, Kirchhoff complexity에 기반해 Jacobian 상호작용이 얼마나 조밀하게 통합돼 있는지를 잰다고 설명됩니다. 쉽게 말하면 연결이 많다는 것을 넘어서 그 연결들이 서로 돌아가며 영향을 주고받는 그물의 밀도를 보는 것이죠. 전깃줄이 여러 가닥 따로 놓인 것과, 그 가닥들이 서로 엮여 하나의 그물이 된 것은 다르니까요.
저는 이 구분이 실제 시스템 관점에서 보면 바로 와닿았습니다. 저희가 새로운 AI 아키텍처를 볼 때도 연결 수만 보지는 않습니다. 연결이 어디서 병목을 만들고, 어느 경로가 끊겼을 때 전체가 어떻게 흔들리는지를 함께 보죠. 단순히 선이 많다고 튼튼한 그물이 되는 것은 아니기 때문입니다. 선들이 서로를 우회하고 보완할 수 있어야 진짜로 통합된 구조라고 할 수 있죠. 논문이 Kirchhoff complexity라는 그래프 이론의 도구를 가져온 이유도 여기에 있다고 읽었습니다.
여기서 또 다른 질문이 따라옵니다. 그렇다면 통합이 지나치게 촘촘하면 오히려 모든 것이 하나로 뭉개지지 않을까요. 이 걱정은 논문의 후반부와도 이어지는데, 차원의 분화와 통합의 조밀함이 함께 가야 한다는 것이 이 틀이 말하는 요지처럼 보입니다. 가닥은 살아 있어야 하고, 동시에 그 가닥들은 서로 연결돼 있어야 한다는 것이죠. 어느 한쪽만 있으면 경험은 빈약해지거나 혼탁해집니다. 이 균형 감각이 이 논문을 단순한 지표 자랑으로 흐르지 않게 붙잡아줍니다.
경험은 왜 수백 밀리초 동안 이어질까
논문이 이 틀로 설명하려는 현상 중 하나는 경험의 지속입니다. 우리의 경험은 순간적으로 반짝이고 사라지지 않고 수백 밀리초에 걸쳐 이어지죠. 컵을 집는 순간의 느낌을 떠올려보시면 됩니다. 손끝에 닿는 감촉, 무게가 실리는 과정, 손목에 전해지는 긴장이 하나의 흐름으로 이어집니다. 왜 이 흐름은 바로 붕괴하지 않고 잠시 유지될까요.
Jacobian의 언어로 바꾸면 이 질문은 이렇게 바뀝니다. 어떤 상호작용 구조는 작은 변화를 금방 감쇠시키고, 어떤 구조는 변화를 오래 붙잡아둘까요. 서로 조밀하게 연결된 구조에서는 한곳의 변화가 이웃으로 퍼졌다가 다시 돌아오면서 잠시 머무를 수 있습니다. 마치 동네 소문이 한 사람 입에서 끝나지 않고 골목을 돌면서 며칠 이어지는 것과 비슷하죠. 연결이 끊긴 구조에서는 소문이 바로 사그라들지만, 그물이 살아 있으면 이야기가 순환하면서 지속됩니다.
이 설명은 마음에 들지만, 여기까지 일반화하기에는 데이터가 부족하다는 점도 함께 말해야 합니다. 지속을 설명하는 후보 기제는 신경과학 안에도 여러 가지가 있기 때문입니다. 재귀 연결, 신경 조절 물질, 주의의 유지 같은 것들이죠. 논문의 기여는 기존 설명을 부정하는 데 있지 않고, 지속이라는 현상을 Jacobian의 지속성이라는 잴 수 있는 형태로 번역했다는 데 있다고 봅니다. 번역이 되면 그다음부터는 서로 다른 설명을 같은 저울 위에 올릴 수 있으니까요.
선명한 경험과 희미한 경험은 어디서 갈라질까
논문은 vivid하게 경험되는 내용과 obscure하게 경험되는 내용을 Jacobian 구조의 차이로 구분하려 합니다. 또렷하게 보이는 것과 어렴풋이 느껴지는 것의 차이를 말이죠. 늦은 오후에 창밖 풍경을 볼 때를 떠올려보시면 됩니다. 눈앞의 나뭇잎 하나는 잎맥까지 선명하게 보이는데, 시야 가장자리의 간판 글씨는 분명히 어딘가 있다는 것만 알 수 있죠. 둘 다 시각 경험이지만 결이 다릅니다.
이 틀에서는 그 차이를 이렇게 읽을 수 있습니다. 선명한 쪽은 입력의 미세한 차이가 출력에서도 미세한 차이로 살아남는 구조이고, 희미한 쪽은 그 차이가 중간에 뭉개지는 구조라는 것입니다. 잎맥 하나하나의 방향 차이가 끝까지 살아남으면 또렷함이 되고, 간판 글씨의 획 차이가 서로 겹쳐서 사라지면 어렴풋함이 되죠. 같은 눈으로 보는데도 느낌이 다른 이유가 연결 구조의 차이로 설명되는 셈입니다.
실제 시스템 관점에서 보면 다음 질문이 바로 생깁니다. 그렇다면 주의 집중이란 이 구조를 일시적으로 바꾸는 일일까요. 무언가에 주목한다는 것은 해당 경로의 기울기를 키우고 다른 경로는 낮추는 것이라고 볼 수도 있죠. 논문이 그 지점까지 직접 말하지는 않지만, 이런 식으로 주의와 의식을 같은 행렬 위에서 이야기할 수 있게 된다는 점이 저는 꽤 매력적으로 다가왔습니다. 물론 이 해석은 아직 논문의 직접 증거를 넘어선 저의 읽기이기 때문에, 조심해서 다룰 필요가 있습니다.
질감과 혼돈과 배움은 같은 틀로 설명될까
논문의 야심은 개별 현상을 넘어섭니다. 질감 경험, 신생아가 겪는다고 알려진 blooming buzzing confusion, 뚜렷한 관념과 혼란스러운 관념의 차이, 학습이 어떤 느낌인지 같은 주제들을 같은 틀로 다루려 하죠. 처음에는 욕심이 많아 보였는데요. 읽을수록 이 목록이 무작위로 모아진 것이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질감부터 보겠습니다. 손끝으로 데님과 실크를 만질 때의 차이는 단일 수치로 환원되지 않습니다. 결이 살아 있는 방향이 여러 개인 상태죠. 이 틀에서는 그 상태를 차원이 많이 살아남은 Jacobian으로 쓸 수 있습니다. 반면 신생아의 혼란은 차원은 많지만 아직 정리가 안 된 상태로 읽힙니다. 신호는 많이 들어오는데 어느 차이가 어느 차이에 속하는지 그물이 정돈되지 않은 것이죠. 마치 이사 첫날 짐 상자가 방마다 어지럽게 쌓인 집과 비슷합니다. 물건은 많은데 어디에 무엇이 있는지 알 수 없죠.
배움에 대한 해석도 같은 선상에 있습니다. 배운다는 것은 그 어지러운 짐을 차근차근 정리해서 서로 다른 차이가 서로 다른 서랍에 들어가게 만드는 과정으로 볼 수 있죠. 뚜렷한 관념은 서랍이 잘 정리된 상태이고, 혼란스러운 관념은 서랍 라벨이 뒤섞인 상태입니다. 개인적으로 인상 깊었던 점은, 학습을 정확도 상승이 아니라 분화와 통합의 재편으로 바라보게 만든다는 것입니다. 점수가 올랐는지를 묻는 대신 경험의 결이 어떻게 달라졌는지를 묻게 되죠.
풍성한 경험은 그냥 사치가 아닐까
논문은 마지막으로 풍부하고 조밀한 경험의 기능을 설명하려 합니다. 왜 우리에게 이렇게 자세하고 촘촘한 경험이 필요할까요. 진화의 관점에서 보면 모든 자원은 비용인데, 이렇게 고해상도의 내면 세계를 유지하는 일은 분명히 비쌉니다. 그렇다면 그 대가를 치를 만한 이유가 있어야 하죠.
논문의 답을 저 나름대로 풀어보면 이렇습니다. 풍부한 경험은 미래의 구분을 위한 여백이라는 것입니다. 지금은 쓸모없어 보이는 미세한 차이들이 나중에는 서로 다른 행동을 요구하는 신호가 될 수 있죠. 와인 시음자가 처음에는 모두 쓰다고만 느끼던 맛을 훈련을 통해 떫음과 산미와 여운으로 나누게 되는 과정을 떠올려보시면 됩니다. (참고로 와인 이야기는 논문에 나오는 예시가 아니라 제가 덧붙인 비유인데요. 차원이 분화되는 감각을 설명하는 데는 꽤 잘 맞습니다.) 처음에는 뭉개졌던 차이가 갈라지면서 선택의 폭이 넓어지는 것이죠.
그런데 여기서는 조금 조심해서 읽을 필요가 있습니다. 풍부함이 항상 좋다는 해석은 너무 쉽게 낙관으로 흐를 수 있기 때문입니다. 실제로는 너무 많은 차원이 한꺼번에 열리면 판단이 마비되기도 하죠. 메뉴가 열 개일 때는 고르기 쉽지만 메뉴가 백 개일 때는 고르기 어려워지는 것과 같습니다. 그래서 논문이 말하는 기능은 무조건 많은 차원이 아니라, 살아남은 차원이 조밀하게 통합된 상태에 가깝다고 읽어야 합니다. 구분과 통합이 함께 갈 때만 풍부함이 행동의 자산이 되죠.
그렇다면 남은 질문은 무엇일까
긴 논의를 마치고 나면 결국 이런 질문이 남습니다. 야코비안 구조가 경험의 구조를 비춘다면, 그다음에는 무엇을 재야 할까요. 저는 앞으로 보고 싶은 장면이 세 가지 있는데, 모두 Gradland라는 수조를 바깥 세계로 넓히는 일과 연결됩니다.
가장 먼저 궁금한 것은 Gradland 바깥에서도 같은 지표가 비슷한 이야기를 들려주는지입니다. 미분 가능하지 않은 발화나 잡음이 많은 시냅스, 측정 오차가 있는 현실 뇌에서는 Jacobian을 깨끗하게 잴 수 없기 때문인데요. 수조에서 통했던 이야기가 바다에서도 통하는지 확인해야 하니까요. 그래서 저는 이 확장이야말로 이 틀이 실제 신경과학과 만나는 첫 관문이라고 봅니다.
여기서 한 걸음 더 들어가면 시간의 문제가 따라옵니다. 지금 틀은 1차 구조라는 순간 스냅샷에 가깝지만, 경험은 흐르니까요. 스냅샷 여러 장을 어떻게 이어 붙여야 흐름이 되는지, 그 연결 규칙이 따로 필요한지 보고 싶습니다. 사진 여러 장이 있다고 해서 자동으로 영화가 되는 것은 아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보고 싶은 것은 행동과의 연결인데, 분화된 경험이 실제로 더 나은 선택으로 이어지는지를 보여줘야 이 틀이 공학적 의미를 갖게 되죠. 구분이 늘어났는데도 선택이 그대로라면 풍부함은 장식에 머물 테니까요.
그렇다면 이 흐름은 어디에서 끊을 수 있을까요. 그 이야기는 마지막에 다시 다루겠습니다. 야코비안이 모든 것을 설명한다는 식으로 읽히면 이 논문을 오독한 것이라고 봅니다. 이 논문은 의식을 정복했다는 선언이 아니라 의식을 잴 수 있는 형태로 바꾸려는 제안이기 때문입니다. 잴 수 있게 되면 틀릴 수도 있고, 틀리면 고칠 수도 있죠. 저는 그 가능성을 열어뒀다는 점에서 이 연구를 오래 기억할 것 같습니다. 경험이라는 가장 사적인 주제를 함께 잴 수 있는 공적인 언어로 옮기려는 시도였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그 언어가 통할지는 이제 우리의 차례가 됐죠.